먼 옛날 봄 왕버드나무 밑을 지날 때면 새록새록 피어나는 연둣빛 말의 울림이 보인다.
울 엄마는 동냥치가 집에 오는 날이면 식구들 보는 데서는 보리쌀 한 종지 건네준 척하고, 맨발로 쏜살처럼 뒤꼍으로 달려가 골목 모퉁이 돌아가는 동냥치를 불러 세워놓고는, 장독대 단지에 늘 미리 숨겨놓은 하얀 백미 한 됫박을 동냥치 자루에 퍼담아주곤 하였다네, 그 시절 우리 식구들한테는 제삿날이나 한번 먹어볼까 말까 하는 고마니꽃보다 더 다보록한 하얀 함박꽃 쌀밥이었는데,
십 리가 훌쩍 넘는 길을 걸어 초등학교 다니던 소싯적, 공동묘지가 있는 저수지 둑까지 마중 나온 울 엄마랑 집으로 돌아올 때가 가끔 있었다네, 몇 번의 그 봄날의 기억이 심한 몸살처럼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갈수록 잦아지고 있으니, 달이 휘영청 밝은데도 아들 마중 핑계로 아들이랑 걷고 싶어 봄바람처럼 살랑살랑 걸어 나오신 울 엄마, 나른한 봄날이면 눈이 부셨던 연두색 풀 무성한 들길이, 화전을 부쳐주시던 진달래꽃길이 호젓이 글썽이는 눈에 아롱거린다네,
“약자들 눈에 눈물 빼지 말아라, 동냥치 바가지는 수북하게 채워줘야 한다,”는
엄마는 아들의 책보자기를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돌다리를 건너 동네로 들어서는 동구 밖 왕버들나무가 서 있는 곳에 다다를 즘이면, 한 번도 거르지 않으시고 이 말씀을 되풀이하셨지, 약자들 눈에 눈물 빼지 말아라, 동냥치 바가지는 수북하게 채워줘야 한다, 왕버드나무도 엄마의 이 말씀을 아마 다 들으며 자랐을까, 세월은 흐르고 흘러도 쇠락의 길을 가지 않고 나의 마음 한가운데 왕버드나무처럼 우뚝 자라난 이 말씀, 아들의 가슴에 박히도록 심어진 울 엄마의 몇 마디 울림이 지금도 나의 핏속을 흐르고 있음을 느낄 때, 어린 아들의 영혼의 밭에 뿌려놓은 부모님 말씀의 씨앗이 시나브로 자라나, 여전히 아들의 생애를 등불처럼 밝혀주고 있으니,
아득한 먼 옛날이 지금도 해마다 봄으로 새록새록 피어나 흐르고 있는 왕버드나무! 그 나무 밑을 지날 때면 생생하게 들리는 그 울림의 말, 자식을 키워낸 말의 힘, 묘연한 봄의 길을 울 엄마랑 뜬금없이 마냥 걷고 있다네,
20230410, 솔물새꽃의 오금동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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