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힘, 산의 위의 威儀를 믿고 의지하며 사는 나는 축복을 받은 자다!
그렇지요, 전혀 산에서는 춥지 않아요. 산에서는 아무리 수은주가 떨어져도 별로 춥지 않아요. 산의 포근한 품이 아늑하게 감싸주기 때문 아닐까요. 그리고 산에서는 강도나 도둑을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산에서는 나의 물건을 단속할 이유가 없지요. 나는 늘 그렇게 믿고 산행이 힘들면 도중에 짐의 일부를 내려놓고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 다시 담아 오지요.. 그대로 내려둔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 산이 지켜주기 때문이지요. 아니다, 산에서는 아무도 남의 물건에 손대지 않아요. 산이 좋아 산에 끌리어 산에 올라온 사람의 마음에는 산이 들어가 있어서, 산을 마음에 들이고 사는 사람의 마음에는 산의 마음이 들어와 있어서 그러지 않을까요.
(어느 페친과 시작한 단문의 문자 대화는 긴 상념이 흐르는 글이 되었다. 비록 우문일지라도 나의 생각과 자연관과 소박한 가치관을 투명한 물빛에 비춰본다. 너그러운 양해를 구하면서 글의 길을 가보려 한다. 우리는 세상 숲에서 살아가는 한 마리 고독한 새인지 모른다. 그 새의 벗이 되어주며 살아야 할 운명인지도 모른다. 너와 나는...)
산의 마음, 자연의 마음이 있다. 물의 성품과 꽃과 새와 나무의 무심한 마음이 산에는 항상 흐른다. 산의 기운, 산의 정기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박꽃 같고 물빛처럼 맑은 마음이 흐르듯이, 울어도 말을 하지 않는 새의 마음이, 꽃피어 웃어도 소리 없는 꽃의 성정이 흐르듯이, 산에는 인간이 함부로 단정할 수 없는 놀라운 힘이 흐르고 있다. 벌써 산은 산을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 산의 마음을 넣어주고 마는 것이다. 산의 마음으로 동화시켜 놓고 마는 것이다. 온유하고 선하며 산을 향한 마음이 겸허하고 열린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면 산은 금세 그 속을 알아챈다. 그 사람의 마음을 열어 산의 포부 산의 드넓은 가슴을 들여놓고 만다.
산의 힘, 산의 위의威儀! 산 앞에서 우리가 작아지고 낮아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산 아래 인간이 사는 이유가 아닐까, 산 위에 사람은 살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산을 좋아하는 사람, 산을 즐겨 주기적으로 산에 가는 사람치고 바탕이 인정 많고 선하지 않은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다. 어찌 산의 마음을 닮은 사람이, 산을 안에 들이고 사는 사람이 산의 큰 뜻을, 산의 드높은 기상을 배반할 수 있으랴, 산의 길, 물의 길, 나무와 새의 길이 자연의 길이요, 동시에 인간이 마땅히 가야 할 인간의 길인 것이다. 인간의 근원이 어디인가. 자연이다. 산이다. 인간과 산은 근원동체이다. 산과 자연 그 자체가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도道의 길이요 덕德의 길이다.
이처럼 산은 말없이 이심전심, 말을 하지 않고도 우리 인간을 가르치는 힘이 있다. 무언의 가르침은 함묵의 보여줌이다. 잠잠히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일처럼 순일한 가르침이 어디 있으랴. 산은 꾸밈없이 보여준다. 산은 절로,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 순실한 산의 마음을 산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가르치지 않고 보여준다.
산의 위의! 산은 그냥 말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냥 존재할 뿐,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않는 깨달음의 도량道場이요, 성스러운 자연 본령의 처소가 산의 형상이다. 산은 산의 집이요, 산은 산의 길이다. 산이 좋아 산에서 사는 산,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요동하지 않는 산, 천태 만상,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을 품어 살리는 산의 힘... 우리는 눈 뜨면 사방에 산이 에워싸고 있는 금수강산에서 놀라운 축복을 누리며 살고 있다. 이 축복의 땅에서 사니까, 산을 곳곳에 두고 사니까, 산에 대한 경건과 감사함을 크게 갖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유럽이나 산이 귀한 나라에서 우리나라를 찾아와 산행하는 젊은 청년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대한민국은 특히 서울 시민은 천국을 누리며 산다고 한다. 맘만 먹으면 지하철이나 시내버스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명산을 두고 사는 삶을 그들은 정말 부러워하는 것 같았다. 산을 한 번 오르기 위해 많은 시간과 비용을 지출하여 비행기를 타고 수 시간을 날아가야 하는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천국임이 틀림없다.
정말 그렇다. 산의 매력, 산의 특징, 산이 본래 지닌 산의 위의 가 아니고서는 번잡한 세인의 마음을 이끌어낼 수 없다. 정말 산의 위의는 대단하다. 산이 도대체 무슨 힘을 가졌기에 사람을 이끄는 힘을 갖는 것일까. 산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큰 힘이 있음은 분명하다. 새소리 물소리 흐르는 산문에 들면 절로 마냥 터져나오는 탄성, ‘아~, 좋다!’ 산의 바람, 산의 기운에 흠뻑 젖으면 얼마나 순간적으로 마음이 따스해지는가, 얼마나 마음이 상쾌해지고 아늑해지는가, 마음에 가득한 뿌연 번뇌와 근심들 순식간에 다 씻어주는 산, 산처럼 좋은 친구가 어디 있으며 산처럼 허물없는 이웃이 이 세상 또 어디에 있으랴. 산은 가슴의 모든 앙금 아픔 분노 미움 갈등 마다하지 않고 다 받아준다. 다 내려놓게 한다. 다 들어준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가득한 어둡고 무거운 부유물들 다 바람에 날려준다. 우리를 정결케 하여주고 위로해주며 마음의 유쾌하지 않은 흔적들 다 씻어준다.
산은 아무 말이 없이도 우리를 치유해주는 힘이 있다. 산은 우리의 심신을 회복해주는 살가운 눈물과 연민을 품고 있는 분명 영혼이 있는 생명의 큰 자연이다. 산보다 더 큰 덩치를 가진 생명이 무엇이랴. 무엇보다 산은 차별하지 않는다. 가슴이 큰 대인의 풍모를 지녀서 한쪽으로 편벽됨이 없다. 공평하고 평등하며 높고 낮음이나 길고 짧음, 선악에 대해 분별심이 없다. 그래서 산에 안기면 절로 편안한지 모른다. 무등無等의 산이다. 열린 마음 큰 가슴 넓고 깊은 마음을 소유한 호연지기의 산, 산의 위의威儀 앞에서 인간은 한없는 행복의 샘물을 건져 올리며 살아야 함이 마땅하다. 산을 누리는 자로 사는 천부의 특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산은 존재의 자유와 해방, 존재의 본래 성정을 맘껏 누리기에 최적의 공간이다. 새소리 흐르고 살가운 봄바람이 부는 동네 인근 숲일지라도 (맘먹기 나름일 테지만) 장수산 그윽한 산취를 느낄 수도 있고, 지리산 세석고원을 지나 촛대봉에 앉아서 굽어보는 연하선경의 고요한 안식까지도 숲의 산에서라면 맛볼 수 있다. 자연(산)의 힘이다. 놀라운 초목이 주는 힘이다. 아무리 현대인이 넘치는 기계문명의 풍요와 편리한 기술의 마법에 사로잡혀 기계와 약물의 신비한 힘에 의존해 필요와 빈곤을 충족하고는 있지만, 이는 어찌 보면 인간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인간성의 정체성을 인간 스스로 훼손하는 죄악의 지름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편리함을 추구하고 소유욕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대가와 비용을 치르고 사는가. 곰곰 생각해 보라. 다시 말하면 현대사회를 살면서 인간의 순수한 자연성이나 본래 지향이 소멸하고 있거나, 그 위험성이 점점 증폭하고 있다면 그 원인은 모두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결과라는 사실이다.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 주범인 것이다. 돈을 위해서, 절제할 줄 모르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인간은 얼마나 자기 자신의 생애와 몸을, 그리고 타인의 삶을 짓밟고 착취하고 학대하는지 아는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다시 한번 겸허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 함께 살 수 있으니까.
우리가 자연의 길을 찾아가야 하는 이유가, 아주 분명한 명분이 여기에 있다. 자연의 길과 산의 길은 한 유기체로서 조화 상생을 추구하는 생태의 세계이다. 이 지구 상에 생명이 있는 존재 가운데 가장 문제가 심각한 생명은 인간이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이 가장 큰 골칫거리인 것이다. 이제 인간은 지금까지 지향해 온 인간의 길을 멈춰야 한다. 오래된 미래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큰 재앙의 불더미 속에 소멸하고 말지 모른다. 자연과 산과 우리 이웃의 삶을 나의 생명처럼 소중히 지켜야 한다. 자연의 원형이요, 자연의 고향이요, 자연의 성정을 가장 잘 간직한 것은 산이다. 산은 자연을 잉태하고 키우고 지켜낸 모성애의 근원이다. 우리가 근원적 안식, 모성애를 누리기에 가장 적합한 곳은 산이다. 우리 밖의 산과 우리 안의 산을 지켜야 한다. 우리가 산에서 쉽게 누리는 평안과 자유와 안식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해방과 회복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산이 본래 이런 태곳적 자연의 성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곧바로 인정할 것이다.
4월 이맘때처럼 산천초목이 아름다울 때는 더 없을 성싶다. 만화방창萬化方暢, 산자수명山紫水明, 천자만홍千紫萬紅, 화란춘성花爛春盛, 특히 봄이면 봄의 자연을 예찬하고 감동하면서 회자하는 이런 사자성어의 울림이 가장 잘 어울린 때가 바로 지금 4월의 봄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봄은 인생의 봄이요, 여리디 여린 연두빛 봄은 순결한 어린아이의 계절이요, 꿈의 씨앗을 흙의 가슴에 뿌리는 때가 바로 지금이다. 4월의 봄 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우리의 머리 위에 구원의 하늘을 꿈꾸며 한 그루 꿈나무로 대지에 서 있을 수 있는 축복을 내린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가 잃어버린 유년의 순결한 어린아이의 심성을 저절로 회복하는 때가 바로 4월의 봄이다. 하늘이 이 땅에 4월을 허락한 이 놀라운 축복을 세속의 물욕에 사로잡혀 어찌 배반할 것인가. 어찌 모른 척하고 번잡한 일상의 기계적 반복에 무심히 혼을 팔고 말 것인가. 하늘이 우리에게 보내준 절호의 기회를 허송하고 말 것인가. 천혜의 자연이 주는 축복에 눈을 뜬 자라야 진정한 행복의 맛을 보게 될 것이다.
하늘의 축복은 누리는 자의 것이다. 천혜의 축복은 누리는 자만이 맘껏 소유할 수 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맘껏 소유하려는 자연에 대한 욕망(이것은 물질과 돈에 대한 탐욕과 분명 다르다. 세속의 소유욕을 비우고 자연을 사랑하는 무소유의 삶이다.)을 가로막을 수 없다. 우리는 엄청난 하늘의 축복을 풍성히 선물 받았는데, 이 엄연한 진실을 인정하지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계산해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직 아파트와 주식과 부동산과 돈만을 귀히 여기고 복잡하게 머리 아프게 계산하며 헤맨다. 신보다 더 돈과 아파트를 공경하고 인생의 모든 것을 다 바치려 덤빈다. 오직 명문대와 일등제일주의와 대기업과 고액 연봉에만 집중한다. 삶의 모든 지향이 오직 소유와 물질의 양과 경쟁에 몰입한다. 존재의 삶, 자연과 교유하고 융합하는 삶, 영적인 신성한 삶, 아름다움과 존재의 실존을 지향하는 삶, 더불어 공동체의 생태적 어울림을 누리는 삶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 머리로는 자연친화적 합일의 필요성을 수긍할지 모르지만 가슴으로 공감하고 행동으로 옮기기까지는 도저히 각골난망이다. 깊은 중병에 들거나 인생의 깊은 고난이나 풍랑 가운데 처해본 사람이 아니고는 좀처럼 자연의 길에서 자연과 융합 조화를 이루는 삶을 선택하려 하지 않는다. 자연을 누리는 단순하고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행복의 가치, 자연으로 지향하는 순결한 존재의 삶을 전혀 실천하지 못하고 생을 허송하고 만다.
천혜의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무한한 축복은 분명 누리는 자, 자연이나 산에 눈뜬 자의 몫이다. 현대인의 행복의 길도 여기서 찾아야 한다. 아무리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해주는 물질이 풍성하고 돈이 많아도 현대인은 이 돈과 물질을 통해서는 결코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돈과 아파트와 명문대와 의사와 판검사가 행복의 조건이 결코 될 수 없다. 이것은 인생 행복의 열쇠가 될 수 없다. 가난해도 늘 부자로 사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 선택이요 신념이요 지향하는 방향성이다. 가난해도 부자로 사는 사람이 있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행복한 자로 잘 살 수 있다. 그러나 부자이면서도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너무 많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 움벨트가 다르기 때문에 쉽게 판단할 것은 아니나 얼마나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인간의 원초적 본질과 속성을 감안하면 가장 건강하고 행복한 삶은 자연과 호흡하고 이 자연의 흐름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누릴 수 있는 여유, 지향이 있어야 열린다. 무위 자연의 흐름에 동화하려는 겸허한 미덕과 관조의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산은 한쪽으로만 쏠리는 현대인에게 균형 잡힌 마음의 평정을 아낌없이 허용한다. 그러나 때때로 현대인은 매우 어리석고 바보스러운 존재의 속성이 있어서, 남이 가는 길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지나친 쏠림현상이 현대인의 병리적 경향이다. 유한한 나그네의 길을, 지극한 찰나의 길을 그림자처럼 지나가고 마는 존재가 인간이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을, 지금을, 이 순간을 안개처럼 떠밀려가고 있는 것이 인간 존재의 운명이다. 비극도 아닌 인간 존재의 마땅한 길이다. 아무도 죽음의 문턱을 뛰어넘을 수가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치,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산천초목으로부터 얻는 풍요, 산과 바다와 새소리와 꽃의 미소와 물소리 등 자연으로부터 한없이 얻어 누리는 행복, 기쁨, 이것들은 그 누구로부터 제약을 받지 않고 맘껏 소유할 수 있고 맘껏 누릴 수 있다. 진정한 자유와 여유가 있는 존재의 삶을 사는 인간이라면 자연(산)의 은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자연은, 산과 바다와 물과 새는 사람을 결코 차별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자연이 품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허락한다. 다만 너와 나의 추구하는 가치와 지향을 어디에 느냐가 우리의 부요한 행복을 결정한다.
결국 자유와 여유를 누리는 일이다. ‘인간적’ 존재로서 사는 일이다. 생명에 대한 외경과 인간의 본질을 위협하는 과잉의 탐욕과 소비와 노동을 막아야 한다. 이 자유와 여유만이ㅣ 인간소외를 막을 수 있다. 우리의 행복을, 우리의 진정한 존재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은 마음이다. 마음의 지향만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가꾸어야 기술을 다스리는 존재로서의, 생각하는 존재로의, 생태적 삶을 중시하는 존재로서의 아우라를 회복해야 한다. 마음을 잘 지켜야 인생을 자족自足할 수 있다.
안분지족 安分知足, 안빈낙도 安貧樂道, 유유자적 悠悠自適, 얼마나 아름다운 뜻과 공감이 담긴 말들인가, 이 말들의 울림을 늘 마음에 담고 살아볼 일이 아니겠는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고귀한 생애의 길을 어쩌자고 헛발 데서 헤매며 허송하고 말 것인가, 자연처럼 산처럼 넉넉한 세계가 이 세상 어디 있겠는가, 산의 모든 것을 누리는 자라면 얼마나 부자인가, 가난해도 부요하게 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가, 하늘이 우리에게 허락한 풍성한 자연을 누리는 자로 살고 싶지 않은가, 자연이 하늘이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허락한 놀라운 축복을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맘껏 누리는 자로 맘껏 소유한 진정 부자로 살 것인가.
나는 지난 일 년 동안 나의 몸을 읽어가면서(조절해가면서) 마음이 지향할 때마다 산을 찾아 아늑한 숲의 길을 걸었다. 맑은 물의 소리 들으며, 작은 몸으로 숲을 흔드는 청아한 새소리를 벗하며 걸었다. 앉아 쉬기도 하고 꽃들에게 다가가 이름을 불러주고 사진도 찍어주고 그윽한 향기에 감동하며 산길을 걸었다. 이때 온몸 온 맘으로 깨닫고 알게 된 것은 산처럼(자연처럼) 열린 마음, 공평한 마음, 포근한 마음을 소유한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산은 무한한 사랑이다. 산은 아늑한 생명의 시원이다. 산은 말 없는 고요한 도량道場이다. 산은 말없이 보여주는 참 스승이다. 산은 무한한 평화와 영혼 회복의 산실이다. 그뿐인가, 자연(산)과 융합한 삶이라야 인간은 심신의 건강을 지킬 수 있고, 유한한 인생의 보람과 양질의 행복의 깊이를 더할 수 있으며 생애의 기쁨을 지속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산은 한없이 우리를 축복해 주는 은혜의 보고寶庫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산에서라면 담보할 수 있다.
산문에 들어 산에 안기면 저절로 아늑한 평안이 나를 감싸준다. 이 보람을 어디서 누리랴. 산을 누리는 자만이 맛볼 수 있는 아주 사소하나 특별한 행복, 누리는 자에게만 산은 축복이 되는 것이다. 산의 큰 가슴 산의 무한한 사랑에 안기면 피폐한 영혼이, 인색한 나의 삶이, 상처입은 마음이 회복됨을, 따스하게 소생하는 것 같은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 봄 햇살에 움 나는 흙의 생명처럼 산의 품에 안기면 메마른 나의 심신이 싱그럽게 되살아난다. 풀잎 위의 이슬처럼 파릇파릇 푸르게 나의 마음의 눈빛이 영롱하게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산이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반기는 것을 느끼고, 산에게 나의 시간 나의 마음의 짐을 다 맡기면 산이 나를 지켜주고 나를 틀림없이 회복해 주는 것을 수없이 체험하였다.
이것은 실제다. 인간보다 더 순실하고 더 원초적인 영혼과 감정과 언어(소통의 수단으로서 초언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산이다. 분명 산은 살아있는 가장 큰 생명의 우주다. 영혼과 감정이 있는 큰 생명이다.
산보다 더 큰 목숨이 어디 있으랴. 살아있는 것 중에 산보다 덩치가 큰 존재가 어디 있으랴. 이 큰 산의 가슴, 그 인자한 품에 안겨 산의 위로와 보호를 받고 있는 느낌이 내 안에서 물안개처럼 피어 일어날 때면, 드디어 나는 산이 되고, 산은 내가 된다. 내 안에 물이 흐르고 새가 노래하고 꽃이 핀다. 살랑살랑 산의 숨결이 내 안에 잔잔한 파동을 이룬다. ‘스티뮹(Stimmung, 정서적 울림), 융합 융일 합일 해조 조화가 절로 이루어진다. 산은 결코 나를 혼자 두지 않는다. 산이 혼자 있는 나의 힘이 되어주고 나의 친구가 되어준다. 산과 나 사이에 그 어떤 거리도 무화하고 만다. 내가 의지하고 신뢰할 믿음의 대상(세계)이 되어준다. 산과 나는, 나와 산은 끝내 하나가 된 것이다.
20230416, 솔물새꽃의 오금동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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