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하루의 길이 소싯적 봄소풍 가는 그때 그 길이었으면 좋겠다, 참샘이 고개 샘물 마시고 입 안 가득 눈깔사탕 맛보며 보물 찾기를 떠났던 봉덕산 소풍 가는 길이었으면 더욱 좋겠네,
나의 생애에 봄소풍 길처럼 마음 흥성거림이 붐빌 때 있었을까, 노르스름한 윤기 자르르 흐르는 차진 찰밥 고실고실한 멸치볶음 짭쪼름한 갈치구이 입맛이 술떡처럼 모락모락 부풀어 피어나는 봄소풍의 설렘 보람, 큰 함지박에 군것질할 것 가득 머리에 이고 우리를 따르던 학교 앞 점방집 공현이 엄마, 끝이 보이지 않는 노란 아가들의 봄소풍 행렬, 나비인지 벌인지 장다리꽃인지 유채꽃인지 모를 들길을 지나고 두어 번의 실개천을 건널 때면 차라리 풍선처럼 둥둥 날아오르고 싶었던 길, 절로 새가 되고 도랑물이 되고 하늘 구름이 되는 무아지경 신바람 아지랑이 피어올랐던 길, 찰찰 흐르는 물소리 한 뼘도 되지 않을 수심, 징검다리 건널 때면 꼭 헛발을 밟아 소풍을 망친 아이들도 간혹 있었지, 이때면 하도 그 아이가 마음에 애처로워 고이 아껴놓은 삶은 거위알을 그 아이에게 살짝이 건네주며 젖은 아이의 눈시울을 닦아준 적도 몇 번 있었던 길, 오늘이 그 길에 닿았으면 정말 좋겠다,
무엇보다 나에게 봄 소풍의 절정은 봉덕산에 올라 바다와 섬을 보는 일이었다네, 산꼭대기에 오르면 늘 마음으로만 그려보던 바다와 섬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으니, 얼마나 부푼 기다림이었는지 몰라, 그러니 소풍 날이 가까워질수록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날이 점점 더 잦았던 것이지, 이 설레는 마음이 흐르는 봄 소풍 가는 길이었으니 십 리 길이 훌쩍 넘는 길인들 팍팍하였으랴, 나는 행렬에서 슬며시 빠져나와 숨이 차 오른 지도 모르고 봉덕산 꼭대기에 단숨에 내달려 올라, 꿈에서도 쉬이 볼 수 없었던 바다와 섬을 나의 두 눈으로 생생히 보았다네, 그 길을 오늘도 따라 걸어볼 수 있다면 내 맘이 얼마나 오지랴, 아직도 내 의식의 배면에 지워지지 않고 꼭 봉인된 내 유년의 풍경, 오늘도 이 하루의 길이 그곳에 닿을 수 있다면, 아마 내 맘에 보름달이 떠오를 것이야,
가을 소풍이 무너미고개로 해 떨어지듯 서둘러 내 맘에 다시 와서 만덕산 다산초당 앞을 지나자고 할 때면, 나는 늘 혼자 떨어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봉곳한 모퉁이에 서서 우두커니 바다를 응시하였다네, 대열에서 멀어지는 줄도 모르고, 모르고, 강과 바다가 만나 하나의 길이 되는 것을 보았다네, 구강포 포구에 다다른 내 유년의 탐진강은 온데간데없고, 강의 길은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음을 알았을 때, 그만 강의 일생이 끝나고 만 것을 나는 그 길에서 처음 보았지, 나를 키워준 강, 강둑의 하얀 삐비꽃 피면 봄과 여름은 온통 나의 세상이었지, 하얀 두루마기를 날리며 탐진강 징검다리를 건너오던 울 아부지, 강을 굽어보며 하늘을 쳐다보며 구름을 바라보며 산을 그리며 자운영 꽃바람 품에 안고 청보리 밭을 뛰어놀았던 나의 유년의 길, 그 길이 나를 다 키웠는데...
장흥 읍내 장에 가신 아부지를 기다리곤 하였던 강둑으로 이어진 길목, 아름드리 소나무 대여섯 그루가 동네를 호위하고 있는 솔밭등 주점, 그 주점에서 사탕을 한 줌 사 내 입에 넣어주신 아부지는 흥에 겨우시면 나를 집 대문 앞까지 등에 업어주셨지, 내 가슴에 아직도 식지 않고 흐르는 아버지의 온기... 나의 보금자리 된 강이 사라진 것을 나의 물빛 눈물 속에서 또렷이 바라보았던 그곳, 그 자리, 어린 나의 눈에 남포 바다의 품은 얼마나 끝없이 넓었던지, 감탄을 주체할 수 없어 혼자만 끙끙 앓았던 그날, 훗날 그 아늑한 바다는 고스란히 내 안에 들어와 내 마음 바다를 이루어 여전히 넘실거리고 있으니, 길에서 길로 이어진 긴 생애의 강은 여전히 내 맘을 흐른다네,
그 후, 나의 바다에 올망졸망 섬 몇 개 떠올라 질옹배기에 부서지는 햇살처럼 강을 잃어버린 서러운 내 눈물을 닦아줄 때면, 어느새 내 마음은 봄 바다에 뜬 섬이랑 하나가 되었다네,
아침 눈을 뜨면 나의 창가에 벌써 와 나를 기다리는 섬 하나, 별처럼 꽃처럼 환히 반짝이는 섬 하나, 내 맘이 심심하면 혼자서도 소풍 가보는 백련사 동백꽃 그림자 떠 흐르는 올망졸망 섬이 보이는 길, 나의 섬이 호젓이 쓸쓸해 보일 때가 많은 남포 앞바다로 이어진 길, 지금은 갈대꽃 날리는 흰 고니들의 겨울 쉼터, 오늘이 그 길로 소풍 가는 길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울 엄마랑 난생처음 나란히 걸어본 연분홍 진달래꽃 핀다고 낮에도 소쩍새가 울었던 길, 옴팡진 공동묘지 근처 밤이면 수문(水門)에서 호곡하는 소리 달무리 진 저수지를, 아들이 무서울까, 걱정이 들어 둑까지 등불 싸서 들고 마중 나온 울 엄마, 엄마는 집으로 돌아올 때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남들 눈에 눈물 빼지 말아라, 동냥치 바가지는 수북하게 채워줘야 쓴다.” 아들의 귀에 박히도록 심어준 엄마의 잠언, 이 말의 울림이 지금도 나의 핏속을 흐르고 있음을 느낄 때, 팍팍한 고갯길 넘으시며 어린 아들 가슴 밭에 뿌린 말씀의 씨앗, 뜻 모를 씨앗이 시나브로 자라 아들 영혼의 양식이 되고, 앞길이 캄캄할 때면 등불 되어 비추어 주고 있으니, 그 불빛이랑 돌아왔던 길이 오늘 이 하루 나의 마지막 가는 길이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어느 초여름 이른 비가 와서 논밭으로 바깥일을 가지 못하고 집에 계신 울 엄마, (이런 날은 우리 엄마에게 일 년 중 결코 두 번 더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늘 엄마랑 살면서도 엄마가 그리웠다. 들로 밭으로 산으로 억척같이 일만 다니신 울 엄마는 어스름한 초저녁 항상 맨 마지막으로 들에서 마을로 돌아오시었다.)
집에 계신 엄마가 개떡을 찌고 쑥전을 부치는 고소한 냄새 온 집안에 퍼질 때면 집안은 사람이 사는 생기가 돌았었지, 서둘러 나의 입가에 번져 흐르는 달콤한 기갈은 토방마루를 서성이고, 꿀꺽꿀꺽 보릿고개 건너가는 배고픈 봄과 여름은 좋아라고, 좋아라고, 노란 복슬강아지들도 꼬리 흔들며 짖으며 엄마가 집에 계신 것을 좋아했던 그날, 오늘이 바로 엄마가 하루종일 집에 계신 그날이었으면 얼마나 좋아 들뜰까,
설날 떡국이 쑥쑥 흐믈흐믈 방앗간 안갯속을 헤쳐 나올 때, 나도 모르게 입 안에 들어오는 따스하게 늘어진 가래떡의 달콤한 맛, 오늘 이 하루가 그 알싸한 설날의 흥성거리는 설렘이었으면 얼마나 좋아, 정말 신바람 날 거야, 정월 대보름날을 기다려 보름달 바라볼 때 소원을 배불리 채워주던 새까맣게 똘똘 만 차진 김 찰밥, 아늑한 행복이 흥건히 흐르는 설날에서 대보름날까지 이어진 나의 길, 흐르지 않는 아늑한 세월의 길목, 그 옛날 넉넉한 정월 보름의 추억이 오늘 하루 길고 긴 길이었으면 나는 얼마나 좋을까,
오늘 하루의 이 길이 석문산 하늘까지 날아오른 연실의 아득한 시작이었으면 정말 좋겠네, 좋겠네, 밤새 물레질하여 엄마의 가슴 올올이 눈물 적셔 뽑아낸 연실, 그 연실 끝에 달린 방패연은 바다를 그리며 날아오르고 싶은 어린 꿈의 돛단배였지, 독수리처럼 유유히 하늘을 차지한 나의 연이 바람을 타고 구름을 넘고 해거름 청둥오리의 행렬에 실려 언덕 너머 하늘 산꼭대기에 달처럼 떠 있을 때, 나는 산 너머 바다가 또 그리워 어스름이 다 되도록 연실을 감을 수 없었지, 오늘이 바로 그때였으면 얼마나 나는 좋아할까.
탐진강 은빛 물결 위로 하염없이 봄날은 징검다리를 건너 흐르고 있다.
지금도 나를 따르는 길, 지금도 나를 인도하는 많고 많은 길, 어린 소년처럼 도랑물 건너 동구 밖 들로 산으로 내달려가고 싶은 길, 그 길이 나의 생애 흐르는 강으로 흐르고 있을 것인데, 오늘, 이 하루의 길이 내 마음 타오르는 우수의 노을길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니랑의 남도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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