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의 길목에서 흘릴 눈물이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할 일이다. 눈물보다 투명한 내면의 고백은 없을 테니까. 나에게 눈물은 정결한 고백이요 물빛 영혼의 표징이다. 눈물은 감사요 기쁨이요 차라리 눈물은 나의 전부다. 내 감탄과 연민의 씨앗이다.
일망무애一望無涯, 진주빛 푸른 창공 정갈한 설악산 신선대 산등성이에 올라앉아 마등령 삼거리를 나서 굽이굽이 공룡능선을 넘어온 길들을 뒤돌아볼 때, 드높고 드넓은 깊고 아늑한 설악의 품에 안긴 나는 너무나 많은 하늘의 축복을 누리는 자로구나, 라는 감동이 눈물의 바다를 떠 흐를 때,
창해일속(滄海一粟), 아주 사소하고 연약하고 가련한 존재인 나에게 우주와 자연은 그리고 천지 산하와 이 세상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요, 기적이요, 아주 특별한 선물이다, 는 고백을 하며 다시 눈물 젖은 깊은 기도를 올릴 때,
넘고 다시 또 넘어 오르락내리락 건너온 가파른 기암절애의 길을 이마의 땀을 씻으며 돌아볼 때, 최서남단 가거도 가는 뱃길에서 부표처럼 표랑하는 한 존재가 망망대해 한가운데 한 점 섬인 것을 보았을 때, 나의 길과 나의 존재의 바꿀 수 없는 운명이 흐르는 눈물 속에서 훤히 비칠 때,
어느 봄날 유년의 탐진강 강언덕에 핀 삐비꽃이 그리워, 그 풋풋한 기억의 길을 더듬어 36년 만에 걸어본 강가에서, 노란 배추꽃 장다리꽃 유채꽃 자욱한 밭둑을 지나 봄바람 남실대는 청보리와 지금도 내 안을 밝히는 수줍은 자운영 꽃핀 논두렁을 걸을 때, 벚꽃이 흐느적거리며 흐르는 강안(江岸)을 지날 때, 흰 무명 두루마기 휘날리며 강을 건너오시던 옛 아버지의 음성을 생생히 들었을 때, 아쉬움과 서러움과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에 얼마나 애절히 울먹였던가,
차라리 눈물은 부활을 갈망하는 기다림이요 내 안의 나를 정화하는 산고의 몸부림이다.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을 흐르는 눈물의 강이 나의 길이었다. 두 눈가를 적시며 하염없이 흘러내린 눈물은 물빛 영혼의 언어요, 그 눈물의 강가에 피어났다 사라지는 한 떨기 꽃처럼, 삐비꽃처럼 피었다 지고 다시 피어 세월의 강을 건너왔다.)
나는 물빛 눈물의 아들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는 눈물로 쓴다. 나도 모르게 흐르는 짭짤하고 달콤한 눈물의 감촉은 세상과 시간을 향한 나의 지향의 촉수다.
아득한 밤하늘 반짝이는 별밭을 볼 때처럼 가슴 저미며 노을처럼 타오르는 슬픔과 우수와 고독의 상념을 적시는 나의 눈물, 내 생애의 길에 때때로 맛본 티끌 같은 보람에도, 가볍게 스쳐 간 기쁨과 환희의 순간에도 늘 축축하게 젖어있던 나의 가슴, 갈앙의 마음 끝자락에 어린 그리움, 애수, 영원한 구원을 꿈꾸는 애틋한 기도 역시 한결같이 나의 눈물의 메타포이다.
오늘, 세한의 길목에서 나의 기억 속 돌아볼 길이 있다는 것, 불러볼 이름과 얼굴이 눈물 속에 아른거린다는 것, 아득한 장막으로 사라져 갈 시간 앞에서 회한의 노을이 나의 가슴에 타오르고 있다는 것은 눈물의 원천이 흐르기 때문이리라. 참 감사할 일이다. 나에게 특별히 허락하신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절로 울고 있는지 모른다.
인생은 분명 길이다. 흐르는 길이다. 가고 오는 길이 있을 뿐이다. 한번 가면 결코 다시 오지 않는 길이 있을 뿐이다. 그 길에서 보고 듣고 노래하고 생각하고 감촉하고 기억하고 기록하고. 이렇게 살아온 길이 나의 삶이다. 남은 날 내가 산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야 한다는 것은 길을 걷듯이 나의 길을 흐르는 일이다. 그 길에 서 보는 것이다. 그 길을 따라 흐르는 것이다.
산을 오르고 내려오듯이 다시 강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 섬에 홀로 서보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할 따름이다. 사는 것은 내가 가지 않아도 지나가고 마는 길의 여정인데, 지나가는 길 위의 기다림인데, 그 길을 나서 참으로 멀고 먼 길을 돌고 돌아 여기까지 온 나의 길. 영원한 흐름 위에 보금자리 틀고 싶은 나의 혼의 떠돌이.(그 시간은 늘 사라져 버리는 찰나여서, 허무하고 덧없고 무상하기 그지없고 가슴 아리도록 슬퍼서, 그래서 나는 구원의 별 영원한 하늘을, 죽음 너머 죽음이 없는, 끝이 없이 흐르는 영원한 곳을, 꿈꾸며 사는지 모른다.)
나의 시간은 영원히 사라진 텅 빈 허공, 아무리 불러도 다시 올 수 없는 바람과 안개의 길. 그러나 아직은 선명하게 또렷하게 구불구불 흐르는 기억의 길에 나는 다시 서 보려 한다. (그 길이, 그 길에서 만난 순간순간의 상념과 꽃들과 새들과 물소리와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별과 별빛이 나의 단 한 번뿐인 생애의 벗이니까, 내 생애의 강이요 나의 길이요 노둣돌이니까, 나의 삶이요 목숨이요 내 존재의 집이니까.)
어느 봄날 진도 운림동 동구 선홍의 동백꽃 서러워 눈물처럼 뚝뚝 떨어져 흐르는 봄의 길목에서 시작한 2022년 나의 여정. 보배로운 섬 진도 첨찰산 강진 도암 덕룡산 주작산해남 두륜산 영암 월출산 장흥 천관산 탐진강을 건너고 장흥 가지산 고흥 금산 거금도 먼바다 건너 탐라의 영봉 한라산 백록담 지리산 설악산 북한산 돌고 돌아 다시 오르고 내리며 예까지 흘러온 나의 길...
그 멀고 먼 길에서, 수많은 아득한 길에서, 이젠 돌아와 지리산 제석봉이어도 좋을, 한라산 삼각봉이어도 좋을, 설악산 천불동이나 대청봉이어도 좋을, 월출산 구정봉 엘레지 꽃길이어도 좋을 어느 그 길목에서 돌아와 나의 길을 돌아보며 기억하며 불러보는 길의 형상들. 헤어진 정든 사람을 뒤돌아 불러보듯 그리워해 보는 눈에 익은 길의 인연들. (벌써 다 스러져 사라져 버린 노을꽂이 인생의 시간이니까. 바람에 이미 떨어져 탐진강물 위에 떠내려가 버린 봄 벚꽃잎이 생애의 시간이니까. 낙화유수의 길이니까.)
이 순결하고 단순한 수많은 나의 벗들을 생각하면 참 고마운 길이 나에게 흘렀다. 지금도 흐르고 있다. 항상 나에게 먼저 다가와 나를 읽어주고 나를 향해 마음 열어준 친구들. 한사코 먼저 나를 불러주고 나를 기다려준 친구들.
그 길에서 만난 순진하고 착한 꽃들의 미소 새들의 청아한 음률 정결한 물의 노래 참 맑은 물빛 물의 가슴 하늘 바람 구름 푸른 금강송의 눈빛 이름 모를 초목의 향기 연둣빛 잎사귀에 부서져 날리는 은빛 봄햇살 푸른 여름의 물결 가을 노을이 타는 섬과 바다와 강 초겨울 서리 젖은 단풍 산국과 금강초롱의 쓸쓸한 눈빛 깊은 산의 숨결이 잠들기 시작한 겨울산의 정적까지... 나의 길에 고맙기 그지없는 벗들, 눈물샘 흘러넘치게 하는 살가운 인정들, 차별이 없는 온유한 친구들 변덕을 모르는 요동하지 않는 나의 삶의 동반자들.
무엇보다 이들은 나의 영혼이 맑아지도록 나의 영혼이 쉼을 누리도록 아낌없이 베풀어주었다. 세상 어디서 이런 벗을 만날 수 있으랴. 참 놀라운 기적이다. 참 기막힌 인연이다. 참 엄청난 자연의 은혜이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생애의 길에, 그 찰나의 길에 스쳐 간 신명 나는 자연의 순결, 자연의 무한한 베풂, 산과 바다와 강과 하늘과 무수한 초목의 목숨들, 새와 꽃과 나비와 별과 구름이 나의 길 동행하며 나를 지켜주고 나의 순실한 벗이 되어 나와 한 길 걸어주었다. 이 세상 어디서, 이 세상 그 누가, 이 작은 나에게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을 연민과 감동을 베풀어주랴.
이 세한의 고달픈 산등성이에 다다라 흘릴 눈물이 있다는 것은 길에서 길을 건너온 나에게 참으로 벅찬 감동이다. 흘릴 눈물이 있다는 것은 정말 고마운 축복이다. 어찌 보면 인생은 누리는 자의 것이다. 인생의 시선을 내 안으로 안으로 향할 일이다. 나를 더욱더 사랑하며 살 일이다. 나의 길에 알게 모르게 함께 한 수많은 인연들에게도 감사하며 사랑할 일이다.
자연은 우리가 그 무엇을 탐하지 않아도 이미 벌써 넘치도록 풍요로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놓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들을 누리기만 해도 즐거울 것인데, 우리는 끊임없이 탐하며 남의 것만 부러워하고 나에게 없는 것만 불평하며 인생을 허송하고 만다. 단 한 번도 나에게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한 채 늘 빈한하게 살다가 탄식하며 세상과 작별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미 있는 것을 누리는 자만이 영원을 꿈꿀 수 있고 그 영원을 마음에 소유한 자만이 인생을 즐겁게 보낼 수 있다. 우리는 인생을 승리한 자로 살아야 한다. 매 순간 부활의 삶을, 초월의 삶을, 살아야 한다. 디오니소스의 상승을 소망하며 뜨겁게 살아야 한다. 앨버트로스 새의 비상을 갈망하며 살아야 한다.)
한 해의 등성이에 올라앉아 지나온 수많은 길을 돌아보며 두 눈에 흐르는 눈물을 감싸 안아보는 일은 참 반가운 일이다. 가슴 저미는 찬란한 기쁨이다. 행복의 좁은 길이 있을 뿐이다. 나의 길에 새로이 깨어나는 봄의 부활이 있을 뿐이다.
(사니랑의 오금동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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