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배우며 나아가는 길- 인생, 둥지를 떠나는 자식을 통해서 다시 그 자식의 자식을 통해서, 끊임없이 깨달으며 '철'들어가는 생애의 길, 비로소 어른이 되어가는 길, 철부지不知가 철들어가는 길.
남녘에서는 자식이 결혼하여 시집가고 장가드는 것을 '여우다'(‘여의다’의 남도 방언)라고 한다. 이제야 '여우다'의 심의(深意)와 그 말의 주변에 달무리 진 회한을 알 것 같다.
이제야, 하나둘 다 떠나는 철(계절, 절기, 때)이 되어서야, 빈 둥지에 홀로 남아 상념 속 그림자 서성거리는 골방 모퉁이 홀로 서 있어 봐야, 보이기 시작하는 길. 지나온 길과 다시 가야 할 남은 길이 비로소 선명하게 교차하는 길. 다시 갈 수 없는 검은 과거의 길과 눈 뜨면 다시 떠나야 할 기다림과 망설임이 붐비는 내일의 길. 두 길은 둘 다 보이지 않는 길이라는 것, 오늘 지금 이곳을 사는 우리 중 아무도 갈 수 없는 길이라는 것. 기다리는 철을 모르는 ‘철不知’가 철을 아는 계절.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속담처럼 숱한 날들 다 지나고 나니, 아들딸이 새처럼 모두 둥지를 다 떠나고 나니, 드디어 길이 보이는 이 지고한 역설의 진리. 이 가을이 되어서야 철이 드는 것은 어인 일인가.
끊임없이 배우며 나아가는 길, 인생. 둥지를 떠나는 자식을 통해서, 다시 그 자식의 자식을 통해서 끊임없이 깨달으며 '철'들어가는 생애의 길, 비로소 어른이 되어가는 길, 철들어가는 길. 그 길이 생애의 길임을 아는 이 가을. 이제야 ‘철’‘철’ 들어가나 보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나이를 먹는다는 일이. 그 지난(至難)한 길의 여정이 ‘철’ 모르는 ‘철不知’가 ‘철’을 알아가는 길이었으니, 이제야 인생의 철을 계절을 절기를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으니, 사는 길이 철들기 위해 흘러온 길이었구나, 독백이 흐른다. 지금, 내가 지나고 있는 철(계절)이 가을임을 문득 알아챈 한 해의 가을을 살고 있으니 참으로 세월이 무정한 것인지, 유정한 것인지, 묘연하기만 하다.
나는 내 위로 누나가 줄줄이 셋이 있었다. 내가 어렸을 적 그 누나들이 띄엄띄엄 시집가는 날이 와서 엄마와 누나가 밤을 새워가며 골무 낀 손으로 지은 혼수품 다 실어 보내고 나면, 마당이니 부엌이니 붐비던 동네 하객들이 다 돌아가고, 집 안에 잠잠히 숨어 있던 쓸쓸하고 막막한 서러움이 밀물처럼 밀려올 때면 엄마는 옴팡진 장독대가 있는 뒤꼍에서, 혹은 솟을대문 옆 늘 그늘진 헛간 으슥한 곳에서 통곡하듯 몹시 서럽게 설리설리 울었다. 해가 다 지고 어두운 정령이 깃들 때까지 어깨 들썩이며 꼬꾸라져 항아리에 고개 얹고 흐느끼셨다. 그 옛날 서글피 흐느끼던 엄마의 눈물과 서러움과 가슴 아린 아픔이 오늘 나의 가슴 끝자락에 전율처럼 찌르며 눈물 적시는 까닭을, 동병상련의 그 애절한 심정을 50여 년이 훌쩍 흘러가고 난 이제야 흐느끼며 공감하고 있음은 내가 철들어가는 길에 들어섰다는 것인가.
살아보지 않고서는, 가보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길,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길, 가슴에 와닿지 않는 길, 인생이 이렇듯 나이 들수록 몰랐던 것들을 알아가는 철들어가는 길인 것을, '철不知'였던 내가 철이 들어가는 길이 나이 들어가는 인생살이인 것을 눈 떠가고 있다. 이제야 비로소 나의 철(때, 절기)을, 나의 계절을, 인생의 가을을 지나고 있으니.
그날, 아들을 이어 살갑기 그지없던 딸까지 둥지를 훨훨 날아 먼 길을 떠났다. 딸을 여운 그날, 그날을 통해, 가슴 아리고 아픈 인고를 통해, 비로소 철든 어른이 되어가는 길. 아픔이 없이 철들 수 없는 길. 어른이 되어가는 길은 철들어 가는 길인가. 자식을 통해 배우고 손주를 통해 깨달으며, 생애의 두터운 허물을 탈각하며 변화해 가는 길, 흘러가는 강물 같은 길, 바다에 이르면 흔적 없이 사라지는 강의 길. 서해 석모도 저녁노을처럼 검은 어둠의 품에 안기고 마는 길.
그 길이 흐르는 강물처럼 안으로 안으로 더 깊어지기를, 흐를수록 더 맑아지기를, 마지막 바다에 다 와 갈 때면 노을처럼 아름답게 소멸하기를 간절히 두 손 모아 가슴에 올려본다. 나이를 먹어도 울긋불긋 물드는 가을 느티나무처럼 곱디곱게 단풍 들기를 하늘을 향해 먼 산을 향해 나를 향해 빌고 빌어본다. 어린아이를 닮아 가는 길이 흐르기를, 꽃처럼 새처럼 흐르는 물처럼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는 길이기를 다시 빌어본다. 부디 그 길이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자연의 길과 화해하는 조화로운 길이기를 갈망해 본다. 나를 묶고 있는 것 하나하나 벗어 버리고, 나를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짐 하나하나 비워버리고, 가벼이 더 가벼이 빈 몸으로 길을 나서는 광야의 베두인의 길이 나의 길이 되기를, 지나온 길을 망각하는 바람의 길이 되기를, 돌아올 길을 기억하지 않는 새의 길이 되기를...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듯이 나를 지우고 드디어 나를 온전히 바다의 깊고 너른 품에 맡기는 길, 바람처럼 물처럼 사라지는 길, 바다와 하늘과 산과 강과 하나가 되는 길, 그 아득한 구원(久遠)의 길을 흐르리라. 부디 나의 가을이 잘 여물기를...
(사니랑의 오금동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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